아직 세계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로도티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배에 힘 주고요, 얼굴은 밑을 향하지 말아요. 시선을 둘 곳이 없다면 절 쳐다봐도 괜찮아요.’
키스가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가까이 붙어있기만 해도 심장이 요동치느라 힘들었는데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스텝이며 홀 전체를 누비는 것 같은 회전까지…. 로도티는 춤이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여력도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했다.
‘데뷔탕트니 뭐니, 오랜 시간을 준비하는 이유를 몸소 깨달을 줄은 몰랐지.’
어찌저찌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면하고 춤을 마무리 한 뒤에는 키스가 다시 한적한 자리로 로도티를 안내했다. 이 상태에서 탐탁치 않은 이들까지 상대했다면 성질머리를 감추느라 곤혹스러울 것이 뻔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꽃밭을 둘러싼 낮은 돌담에 걸터앉아 어지러운 머리를 잘게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로도티를 보고 물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뜬 키스는 다시 귀족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로도티가 앉아있는 쪽을 힐끔거리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들리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다 알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 남작은 어떻게 초대했냐느니, 친분이 있는 사이였냐느니, 왜 어울리냐느니…… 뻔했다.
난처한 낯을 한 키스는 로도티가 있는 곳을 확인하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느긋한 얼굴로 길을 막고 있는 손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두 개의 물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자리를 피했다.
“좀 괜찮아졌나요?”
“아, 네, 뭐……. 그럭저럭이요.”
그러고는 로도티의 곁에 와서 퍽 미안한 얼굴로 옆에 앉았다. 키스가 건네준 물잔을 들고만 있으며 로도티는 말을 골랐다. 춤이 고약하다, 귀족들의 시선이 어떻다 해도 키스가 자신을 망신시키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동시에 어설픈 스텝을 밟으며 키스의 발을 무참히 짓밟았던 과거도 떠올랐다. 슬쩍 시선을 내려다보니 광택이 났을 신발이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로도티는 물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제가 발을 너무 많이 밟았죠……. 죄송합니다, 춤이 처음이라서요.”
“억지로 끌어들였으니 이정도는 감수해야죠. 괜찮아요. 그리고 저보다는 남작께서 더 고생하셨고요.”
불쾌함이라고는 티끌도 보이지 않는 얼굴에 그렇지 않다고, 아팠을 거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춤이 힘들다고 투덜거리고, 키스의 신발을 무참히 밟은 것이 조금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히고 있자 키스는 와인잔을 들고 다니는 시종을 불렀다.
“미안하다면 저와 더 어울려 주실래요? 첫 춤을 춘 상대에게 더 신경 쓰고 싶은 것도 있어요.”
키스가 반쯤 비운 물잔을 시종의 쟁반에 올려놓고 연한 적색의 와인을 두 잔 집었다.
‘나한테 왜 계속 신경 쓰는 거지….’
처음 보는 상대에게 과한 관심이 아닌가 싶다가도, 크림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로도티는 스스로가 취향인 얼굴에 이토록 약한 사람이었는지 짧은 고찰을 하고 싶었다.
키스가 미미하게 줄은 로도티의 물잔도 시종에게 들려 보내고 와인잔을 건넸다. 짙은 술 향이 훅 올라왔다. 이건 좀, 자제해야겠지. 로도티는 술을 좋아했지만, 장소를 구별하지 못하고 마실 정도로 생각이 짧지 않았다.
다소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잔을 부딪히고 키스가 먼저 와인에 입을 댔다. 한 모금, 두 모금. 로도티는 그런 키스를 보며 잔을 빙글빙글 돌릴 뿐이었다.
“술, 안 마셔요?”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아… 제가 신경을 못 써드렸네요. 그러면 같이 어울려 주기만 해요. 춤 상대를 혼자 두게 하지 않을 거죠?”
그렇게 말하면 먼저 일어나기도 어려웠다. 로도티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의 향을 맡았다. 라즈베리 같은 과일 향이었다. 이거, 많이 맡아본 향인데…….
“이거 레브뉴 지방에서 제조한 와인이에요?”
“어, 향만 맡고 바로 알아차리셨어요? 레브뉴에서 제조한 거 맞아요. 선대 황제께서 즉위하셨을 때 포도 농사가 풍년을 맞았잖아요. 그때 만든 와인을 겨우 공수해왔죠.”
레브뉴 지역은 거의 와인만 만든다고 봐도 무방했다. 매년 품질 좋은 와인이 제조되고, 알음알음 소문을 타던 것이 한 상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유통이 되며 이름을 알렸다. 명망있는 귀족이라면 레브뉴 지역의 와인을 몇 개씩 소유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질 정도였다.
로도티는 자신의 재산으로 구하기 힘든 와인이 손에 들려서 잠깐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옅은 적색에, 부드러운 과일 향. 그리고 알코올 향이 강했다. 맛있긴 해도 도수가 높아서 취한다면 금방 정신을 놓게 될 것이 뻔했다. 선대 황제의 즉위 때 제조한 와인이라면 도수가 높기로 유명했다. 이런 술이 왜 연회장에 돌아다니고 있지? 더군다나 이미 키스의 볼이 상기된 것 같고……. 잠깐. 로도티는 눈을 의심했다.
“르디엘 백작…?”
노란 불빛에 의지해 바라본 키스의 얼굴이 영락없는 취한 사람의 것이었다.
*
“아…… 미안해요. 이런 부탁을 해서… 침실은 복도 안쪽에 있어요.”
“네, 네… 발 조심하세요.”
취하기만 해봤지, 취한 사람을 부축한 경험이 없는 로도티는 대답하기도 버거웠다. 키스는 와인을 마시다 취했고, 연회의 주최가 술에 취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로도티에게 부탁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방까지 같이 가줄 수 있나요? 이제 막 만난 사람에게 할 부탁도, 들어줄 부탁도 아니었지만 로도티는 알았다며 허락했다. 이 얼굴이 뭐라고.
다행스럽게도 키스는 술주정을 심하게 부리지 않았다. 문제는 로도티 자신이었다. 밤의 분위기와 취기로 젖은 눈동자와 마주칠 때면 심장이 훅 떨어졌다가 요동치기 바빴으나 들키지 않으면 됐다. 옷 아래로 단단하게 만져지는 허리도 침실까지만 데려다주면 잊을 것이다. 로도티는 암시를 걸다시피 생각했다.
“……로도티.”
로도티는 방금한 생각을 고쳤다. 키스 르디엘, 르디엘 백작은 술버릇이 아주 고약했다. 아무런 사전 고지도 없이 제 이름을 부를 이유는 무엇인가. 마른 침을 삼킨 로도티가 듣지 못한 척을 하며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에 도착했으니 근처에서 시종을 불러올게요. 많이 취하셨어요.”
침대에 눕혀주고 나가자. 이대로라면 키스가 이끄는 분위기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휩쓸릴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먼지 한 톨 없어 보이는 침대에 감탄은커녕 시선도 주지 못하고 키스를 눕혔다.
하얀 이불 위로 옅은 금발이 흐드러졌다. 후, 하고 가늘고 긴 숨을 뱉은 키스가 몸을 돌려 비스듬히 누웠다. 취기인지 무엇인지 모를 열기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움직여 로도티를 보았다.
“그라시아 남작, 로도티…. 계속해서 붙잡는 남자는 구질구질하겠죠. 매력도… 없을 거고요.”
자조적인 목소리는 크지 않아서 혼잣말 같았다. 그야 물론, 주제도 모르고 자신만 잘난 줄 아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꽤, 아니 대부분이었지만 이 백작은 술에 취해 누워있는 모습마저 화폭에 담고 싶을 정도였다. 로도티는 손에 닿았던 근육의 짜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키스는 그런 말을 하고선 눈을 감았다. 말하던 사람이 조용해지니 방안이 삭막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잠든 건가? 아주 맑게 갠 하늘 같은 눈동자가 사라지자 로도티는 내심 아쉬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다시 했다는 걸 깨닫고 소스라쳤다. 그만해, 좀!
키스의 다리는 아직 침대 밖으로 나와 있고 옷도 연회복 그대로였지만 로도티는 방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처음 본, 그것도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매력을 어필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군요.”
잠든 것으로 착각할 만큼 고요했던 키스가 돌연 눈을 떴다. 졸음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을 깜빡인 그가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조금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아무렇게나 쓸어넘겼다. 로도티는 다시 심장이 펄떡거렸으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키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누구를 상대로 두고 말씀하시는 건지요?”
취향인 남자와 연애 소설 같은 일을 겪었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이었다. 기대라는 것은 항상 무참히 짓밟히기 바빴던 감정이었으므로 로도티는 볼품없는 목소리를 숨길 수 있었다. 창문의 커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속에 교묘히 몸을 숨겨 표정을 감췄다. 저 백작이 애단 목소리로 어느 영애를 원한다고 해도 로도티는 덤덤히 그러냐며 대답할 것이었다.
"……."
키스는 아직 다 떨치지 못한 취기에 잠식되지 않으려 뜸을 들였다. 취한 사람의 주정인가? 그렇다기엔 남작이 저를 부축하며 잘게 떨리는 손과 달게 내뱉는 숨을 생생히 기억했다. 계단을 오를 때는 자신을 신경 쓰느라 주춤거렸다. 다 올라온 뒤로는 제 얼굴을 확인했고, 방문 앞에서 또 한 번의 망설임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의로 점철된 행동의 연속이었다. 로도티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숨어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지 않자 스스로가 취해서 방까지 끌어들이고…… 하지만 거기에 진심이 없었느냐고 반문하면 대답하지 못했다. 키스는 로도티에게 묻고 싶었다. 사실은 마법사가 아니냐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재주를 부려 제게 죄책감과 당신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냐고.
로도티에게 묻지 못할 질문이었으므로 키스는 인정해야만 했다. 태양의 앞에 허리를 숙인 과거를 후회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라시아 남작에게도 제 진심이 가미되었음을. 그는 지금 붙잡지 않으면 다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을 사람 같았으므로 키스는 무리해서라도 크게 한 발자국 나아가기로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대한 제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로도티, 저와 더 어울려 주길 청합니다. 그대의 시간에 제가 함께하길 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