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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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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백작이 주관하는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니, 그대가 잘 봐주어야겠어. 그자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야.’

제국의 태양이 직접 호명해 내린 지시였다. 웅장한 응접실 대신 다소 소박한 서재에서 이루어진 만남이었으나 조용하고, 그만큼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키스는 태양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몸. 한 치의 의심이나 반발 없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허리를 숙였다.

그게 바로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키스의 지시 아래에 연회 준비는 차질없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한 시간 뒤에 호화스러운 손님들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키스는 시종이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창밖을 확인했다. 적당히 구름이 껴있어 노을이 지는 이 시간에도 눈이 많이 부시지 않았다. 어차피 연회는 해가 진 뒤, 선선해지면 진행될 것이니 비만 오지 않는다면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단순히 교류의 목적으로 진행된 연회는 황제의 한마디에 어떤 사람의 마음을 가로채야 하는 비밀스러운 목적을 감춰야 했다. 아주 곤란하지 않다고는 하지 못했으나지고지순한 태양에게 반기를 드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초대장의 끝무렵에 급히 추가된 사람은 로도티 산스 그라시아, 수도 끝자락에 자리 잡은 남작 가의 일원이었다. 선대의 남작 부부는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하다가 어느 순간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으니 뒤를 이어서 장남이 그라시아 남작이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선대 남작 부부가 집안의 재산을 거덜 내다시피 썼으니, 집안에 남은 돈이 많지 않았다. 그라시아 가는 수도 중심에서 변두리로 이사 가야 했고 신년 연회나 황제의 탄신 연회같이 꼭 참석해야 하는 종류의 연회가 아니라면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런 사람이 왜 이 연회에는 참석하겠다고 답신을 보냈는지 모르겠네.’

키스는 시종을 내보내고 오늘 착용해야 할 커프스 링크를 들어 소매 단추에 끼워 넣었다. 로도티 산스 그라시아, 로도티애석하게도 그 남작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기껏해야 사교계를 몇 번 들락거리면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신상과 거짓으로 점철된 헛소문이 그에 대한 전부였다.

33, 여동생이 있고, 인간관계는 전멸에 가깝다. 업무상의 목적이 아니면 공식적으로 영지를 나서는 모습을 보기 드물다. 그래서인지 그라시아 남작에 대한 평가는 두 분류로 갈렸다. 아예 관심이 없거나, 선대가 만들어놓은 진흙탕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조롱하거나.

사람들의 말이 어떻든 키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교계의 소문이 백이면 백에 가깝게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보다는 그라시아 남작에 대한 흥미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에게서 무슨 정보라도 빼내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누가 알았겠어.’

가문의 문양이 각인된 커프스 링크 위를 엄지로 문질렀다. 까끌까끌한 감촉도 이제는 익숙했다. 다소 긴장되어 경직한 얼굴 근육을 미소로 풀어냈다.

 

*

 

저택 앞, 널따란 정원에서 진행되는 연회는 부족함 없이 흘러갔다. 여전히 구름이 끼어 흐렸지만, 간간이 모습을 비추는 달이 더 운치 있기 마련이었다. 악단의 음악이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섞이고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는 초와 램프 덕분에 평소의 연회보다 덜 소란스러웠다. 분위기에 맞춰 귀족들이 점잖은 척을 했다.

소리가 벽에 부딪혀 울리는 것보다 나으니 키스는 만족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찾아야 하는 사람을 아직 마주치지 못했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인사를 하러 나왔을 때 끄트머리에서 보았는데, 그새 어디로 모습을 감췄는지.

키스는 제게 인사하러 온 사람에게 적당히 대꾸해주며 그라시아 남작의 외모를 떠올렸다. 검은색 머리카락, 노란 눈, 키는 자신보다 약간 작고늘 웃는 얼굴이라고 했던가. 다른 사람과 착각해서 불상사를 일으킬 수 없으니 초상화도 미리 받아봤었다.

아마 어울리고 있는 사람도 없겠지. 그야말로 외딴섬 같은 신세일 테니 키스는 재주껏 손님을 다른 손님과 인사시키고 자리를 떴다. 희미한 술 냄새와 분 냄새, 각종 향수 냄새를 지나쳐 정원의 풀숲에 다다라서 원하던 사람을 찾았다.

남작?”

키스는 다시 야외에서 연회를 연 것을 후회했다. 램프가 빛을 비추는 자리를 적절하게 비켜서서 서 있는 사람을 겨우 알아보았다.

전혀 줄지 않은 술잔을 손에 들고, 친목의 장이 이루어지던 건너편을 비뚜름하게 보던 그는 키스의 부름에 표정을 바꾸었다.

, 르디엘 백작님. 인사가 늦었지요. 연회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께 부족한 연회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남작이 계시는 자리 같이 조용한 곳을 좋아해서요. , 비켜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연회의 주최자이지 않으십니까?”

주최자인 만큼 휴식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이 자리를 피해서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로도티는 반쯤 강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옆에 선 키스를 힐끔거리느라 바쁜 것이 이유였다. 볼일을 보고 겸사겸사 연회에 참가했지, 주최자가, 그것도 꽤 제 취향의 얼굴을 가진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꼼지락거리느라 부산스러워 보였을 거라고 로도티는 생각했다.

조용한 곳을 찾아서 왔다고 했지만, 로도티를 옆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는 공통된 대화 주제를 찾는 자리가 아니고, 무언가 적당히 반응을 끌어낼 만한…….

.”

“?”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요. 마침 첫 춤을 추어야 하는데, 제 파트너는 없고.”

키스가 부드러운 선율 사이로 그를 찾는 사람들을 향해 눈짓했다.

좋은 상대가 옆에 있군요. 저와 춤을 추지 않으시겠어요?”

키스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로도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움찔거리는 몸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잘 보였다.

……제게 춤 신청을 하신 게 맞나요?”

그대에게 춤을 청하고 있는 게 맞으니, 제 손을 더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영애들에게 할 법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향하는 곳이 자신이라니, 로도티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부족해서 이 백작이 저에게 춤을 추자고 하나? 당장 아무 영애나 붙잡아도 거절할 상대는 없을 것인데.

하지만 키스가 내민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고 슬슬 사람들의 이목도 이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로도티는 눈을 질끈 감는 심정으로 키스의 손을 잡았다. 요란스럽게 심장이 뛰는 이유가 긴장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작, 르디엘 님저는 춤을 출 줄 모르는걸요.”

어릴 적 로도티가 사교댄스를 배워야 할 돈은 전부 어른의 사정으로 빠져나갔다. 더욱이 이 상황에서는

내가 여자 역할이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곤란했다. 지금이라도 손을 물러야 하나. 옅은 금발이 주황색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갈등하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보고 열이 훅 올랐다.

제 발을 밟아도 괜찮아요. 잘 따라오기만 하면 무도회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리죠.”

귓가에 닿는 숨이 간지러웠다. 로도티는 키스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화끈거리는 뺨이 너무 티 나지 않기를 바랐다.

키스는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며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로도티와 손을 잡고 걸어오는 그를 보고 작은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금방 사그라들었다. 키스의 태도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분위기를 띄울 첫 타자로 충분했다.

두 주인공을 위해 비어진 무대의 한가운데로 자리를 잡았다. 사방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따끔거렸다. 로도티는 마른 침을 삼키다 키스를 올려다보았다. 긴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입 모양으로 말을 전한 키스가 로도티의 허리를 감쌌다.

키스와 로도티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한 손은 각자의 허리와 어깨에 올라갔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나뭇잎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 퍼지고, 키스가 악단을 향해 눈짓했다. 활대가 내려가며 바이올린 소리가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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